김영태 <경계선 상에 존재하는 이미지> 사진예술 2014년 11월호

<사진예술 2014년 11월호>

경계선 상에 존재하는 이미지 

김영태 | 사진비평

우리는 일반적으로 특정한 사진이미지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때 그림 같다는 말을 한다. 평면이미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여전히 고전적인 시각매체라고 말할 수 있는 회화라는 것을 내포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리얼리티가 제거된 사진이미지일지라도 컬러, 톤, 디테일 등 작품의 표면을 이루는 시각적인 요소가 회화의 그것과는 많이 차이점이 있다. 시각적으로는 유사하게 느껴지더라도 회화가 재현할 수 없는 또 다른 세부가 있다. 다만 사실적인 요소가 극도로 배제된 사진을 관습적으로 그림 같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특히 디지털사진이미지는 회화와도 내부 및 외부가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아날로그사진과도 다른 층위에서 존재한다. 

    이주형은 그동안 표현대상과 관계없이 시간, 기억, 감수성, 예민함, 서정성 등과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 사진작업을 보여주었다. 노스텔지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원, 근대건축물, 드라마세트장, 자연풍경 등 다양한 대상을 다루었지만, 그것들의 고유한 시각적 특성 및 문화적인 의미와 관계없이 작가 특유의 예민함과 정서가 느껴지는 결과물을 생산했다는 의미이다. 사진은 이미지를 생성하는 프로세스process에 작가가 전통적인 시각예술처럼 수공예적으로 개입한 결과물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기계적인 장치를 이용함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내면적인 영역이 명료하게 투사된다. 

    그래서 사진을 통하여 찍은 이의 내면적인 영역을 일정부분 파악할 수 있다. 대상의 선택, 표현방식의 선택등과 같은 이미지 제작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생산한 이미지는 감성적인 요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시대성 등과 같이 보는 이의 이성을 일깨워주는 내러티브도 드러난다. 작품의 표면과 그 이면이 감성적인 요소만 채워져서 보는 이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이성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업에선 디자인적인 특정한 공간에서 만난 창窓과 그것을 통하여 바라본 풍경을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전시작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의 질감을 감각적인 색채로 묘사한 결과물도 있고, 블라인드 사이로 보이는 바깥풍경을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게 재현한 이미지도 있다. 또한 창을 통하여 드러나는 인공구조물이 디테일의 상실로 인하여 자연풍경의 일부로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가 하면, 실내 공간을 극단적인 화이트 톤으로 변주하여,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가장 사진적인 재현방법을 선택하여 대상을 다루었다. 하지만 작가의 정서, 조형감각, 매체의 특성 등이 효과적으로 작용하여 낯설게 다가오는 특별한 결과물이 생성됐다. 디지털테크놀로지가 작용하여 만들어낸 또 다른 변주물이다. 전시작품 한 장 한 장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인화물의 표면이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자아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가 적극적으로 매체의 특성을 수용했기 때문에 성취한 결과이다. 작가의 아날로그적인 정서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주형이 이번에 발표한 ‘Grid Landscape’시리즈는 단순하게 분석하면 시각적으로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색면 추상화나 한국회화의 특정 경향인 단색화와 유사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접근하면 분명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지의 작동원리도 많은 간극間隙이 존재한다. 

    우선 이주형이 생산한 이미지는 디지털테크놀로지가 작품의 원초적인 뿌리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디지털사진 고유의 특성이 일궈낸 성과물이라는 얘기다 아크릴이나 유화물감으로는 생산할 수 없는 독특한 컬러가 작품의 표면을 채색한 것이다. 작가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예술가이지만 학문적인 태도로 작품을 분석하고 스스로 선택한 도구의 특성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이론가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매체를 예리하고 엄정하게 분석한 결과를 자신의 작업프로세스에 적용해서 최종적인 결과물을 생산한다. 작가의 작품은 이 지점에서 모더니즘 회화와 분명한 차별점이 발생한다. 

   또한 사물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섬세한 정서와 시대성을 반영하는 결과물이라는 것에서도 분명한 변별요소가 존재한다. 동시대적인 첨단미디어를 이용하여 새로운 층위에서 작동하는 조형언어를 생산한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여러모로 경계지점을 넘나든다. 사진과 회화, 디지털이미지와 아날로그이미지, 공간의 내부와 외부, 인공물과 자연물 등 작품을 이루는 다양한 미학적 요소들이 무게의 중심을 유효 적절하게 견지堅持하여 작품의 내피內皮 및 외피外皮를 구성했다. 그 결과 보는 이들에게 감각적이면서도 당대當代적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최연하 <이주형, Grid Landscape> 월간미술 2014년 11월호

<월간미술 2014년 11월호>

Crtic, 전시리뷰: 

이주형 Grid Landscape

최연하 | 스페이스22 큐레이터    

이주형은 근작 <Grid Landscape>(2012~)에서 작가 특유의 고즈넉하고 적적한 풍경을 내놓는다. 수평과 수직의 선분 사이로 비치는 하늘과 선과 강은 같은 것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풍경인 것 같지만 언젠가 그 장소에 한 번쯤 서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을 안겨준다. 창의 프레임이 없었더라면 평범한 풍경이다. 카메라의 프레임과 창틀, 두 겹의 프레임을 통해서 돌연 삶의 한 모퉁이를 보여주는 것 같은 이 작품은 창문 앞에 서 있었을 개별 존재들의 긴 여운을 모아낸 듯 미묘한 밝기를 끌어올리고 있다. 무엇보다 이미지의 경계성을 존중하는 작가이기에 단정하게 다듬은 화면은 과장됨이 없이 균형 잡힌 형태 속에서 단단하고 압축된 풍경을 확보하고 있다.

gl, Ic-12, 2013

gl, Ic-12, 2013

그런데 이 풍경 연작은 창의 블라인드와 커튼, 가림막에 가려져 있다. 그러내면서 감추고, 투과되면서 스며들고, 흐르면서 차단되는 빛의 변주는 수평과 수직의 틈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이뤄진다.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되며 매우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분명 어떤 ‘장소’를 염두에 둔다. 그 ‘장소’란 원근법의 도움으로 뒤로 물러나 하나로 고정되는 시각적 환영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현시(現示)되는 세계이다. 유일무이한 내가 서 있는 장소에서 바라본 ‘이 풍경’인 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유리 창문 너머의 ‘한 풍경’이 아니다. ‘이 풍경’이 ‘한 풍경’이 될 때 내게만 단독적인 풍경은 수만의 풍경으로 희미해지지만, 내게만 보이는 ‘이 풍경’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바람과 햇볕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표상이 된다. 

    어쩌면 풍경(風景)사진은 이 단어의 함의처럼, ‘바람이 만들어낸 경관’‘바람과 햇볕’이 담긴 사진일지도 모른다. 바람과 빛을 포착한다는 것은 창의 바깥과 안의 충돌이 빚어낸 흔적을 기입하는 일이다. 그리드로 분할되어 형과 색을 최소화한 미니멀한 이 풍경이 갇혀있지만 바깥으로 무한히 확장되어 보이는 이유이다. 바깥으로 향하면서 안으로 열려있고, 바깥이 들어오게 하면서 안을 비우는 것. 풍경을 개념화하고 일반화하기에 바쁜 시각 위주의 우월한 주체는 오직 ‘TTL’(사진용어 Through The Lens)에 의한 빛의 양을 계산하겠지만, 이주형의 시선은 개방된 조리개처럼 빛의 밀도를 최대한 집적했다. 땅의 경관을 뜻하는 ‘Land Scape’의 한정된 의미만으로는 이주형의 사진은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다. ‘이’ 풍경은 ‘그’장소에 있어야 비로소 열리는 풍경이기에.

김석원 <그리드 - 빛의 흔적과 중립적 시선, Grid Landscape 서문> 2014년 9월

그리드 - 빛의 흔적과 중립적 시선 

김석원 | 시각예술비평

‘격자 풍경’에 나타나는 빛은 영원성이 배경음악처럼 깔려있다. 빛의 영원성은 신체에 갇힌 인간의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으로 연결된다. 작품에 드러나는 빛의 성질을 살펴보면, 창문을 통과해서 건물 내부로 스며든 빛 자체는 앞, 뒤, 상, 하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의도는 빛을 통한 자아와 관객과의 공명이기에 강렬함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 보이는 빛의 묘사는 디지털 작업의 극한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확인이 가능 한 지점이다. ‘격자 풍경’에서 의도하는 빛은 천천히 관객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 빛 은 어떤 메시지를 강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온화한 상태를 유지한다. 

    ‘격자 풍경’의 그리드는 형상을 정확하게 표현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건축적인 실내 구조가 포함되어 형상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고 의도적으로 평범한 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가는 외부의 풍경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드의 공간을 군데군데 비워둔 상태로 표현하며 블라인드, 커튼 등의 가림막을 사용해서 창 밖의 풍경을 투영된 이미지로서 바라보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빛의 흔 적’을 통해 외부 풍경의 가시성을 슬쩍 보여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빛의 흔적’이 공간에 침투하면서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풍경의 실재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암시성은 비가시적 공간을 유보해서 실재의 풍경을 신비로운 대상으로 환원시킨다. 이로서 관객들은 ‘빛의 흔적’이 남긴 이미지를 통해 물질적인 인식을 부여 받고 공간과의 조용한 교류로 암시성을 체험한다. 

그리드 - 심미화와 추상표현주의 사진 

‘격자 풍경’은 추상표현주의의 개념과도 유사한 지점을 지향하는데,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화면을 가득 메운 그리드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역으로 개방된 이미지로 다가 올 수도 있다. 그리드 밖의 자연풍경은 공중에 부유하는 듯 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풍경은 관객의 시선을 벗어나 미끄러지듯이 밀려나기도 한다. 이처럼 ‘격자 풍경’의 추상적 특징은 ‘거울 효과’를 드러내기에 매력적인 요소로 작동한다. 

    추상화된 ‘격자 풍경’은 무엇이 존재한다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부재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공간으로서, 그곳 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화면 속 공간은 마치 진공상태 속에서 부유하는 중 성적 공간으로 남게 되는데, 이 공간은 인간의 사적인 기억이나 체험이 남아 있는 장소가 아니라 상실된 장 소로 각인된다. 관객은 간결한 이미지에 익숙하게 다가가지만, 한편으로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되는 것 이다. 공간의 의미는 공간을 사용하는 주체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격자 풍경’의 공간은 인간의 개 인적인 삶과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따라서 이곳에서 공간이 장소화 되는 주체를 찾을 수 없다.

    ‘격자 풍경’을 되새겨보자. 빛의 영원성을 전제로 빛의 효과적 측면에서 자아와 관객과의 공명을 시도하고 그리드를 통해서 가시화하는데, 이때 그리드는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모더니즘적 질서 를 벗어나서 관객이 각자 체험한 이미지를 상상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사진 이미지를 경계 없는 지점으로 확대했다는 점이다. ‘격자 풍경’의 새로운 시도는 구상과 추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대중성과 예술성, 관객과 작가의 전통적인 경계를 허물면서 현대사회에서 사진의 맥락을 재탐색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주한 <근대건축, 소멸되는 아름다움> 포토플러스 2010년 7월호

<포토플러스 2010년 7월호>

근대건축, 소멸되는 아름다움 

이주한  |  순천대 교수

오랜 인연은 사소한 계기로 시작되기 마련이고 처음 만남이 언제였는지 대개 기억 못하기가 일수이다. 내가 사진가 이주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즈음 뉴욕대 동문회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대동산수’ 전시의 같은 멤버로서 정기적으로 만나면서부터 그와 깊게 교류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이름이 항상 화제가 되곤 했다. 이로 인해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촌 아닌가 하는 농담 섞인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 자리를 빌어 확인하는 바이지만 그와 나는 인척으로서 아무 관계도 아니다. 하지만 같은 사진가로서 교수로서 그 누구보다도 각별한 유대감을 갖는 동료인 것만은 분병하다. 그를 떠올리면 온화한 성품과 지적인 면모가 가장 먼저 다가온다. 이 같은 침착하고 온화한 성격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만남 이전의 작업들로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유학 생활 동안 토이 카메라나 핀홀 카메라를 사용해서 작업한 ‘기억의 풍경’의 여러 시리즈들이다. 주로 뉴욕의 센트럴 파크나 브룩클린 끝자락의 코니 아일랜드에서 촬영된 사진들은 마치 사라진 기억을 다시 불러와 모호하게 뒤엉킨 듯 시간의 아우라를 드러낸다. 비록 시기는 다르지만 나 역시 뉴욕에서 한동안 유학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기억의 풍경’ 작업이 갖는 대외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그의 작업은 내게 있어서 외롭고 가난한 유학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적이 없는 도심 안의 공원이나 일광욕을 위해 드문드문 늘어선 사람들 사이를 카메라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대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주형과 서로 깊은 공감대를 갖게 된 계기는 2000년 비슷한 시기에 각각 경주와 마산에서 대학의 교수생활을 시작하면서이다. 이후 같이 활동하던  ‘대동산수’전을 제외하고는 그의 작업을 보기가 어려웠다. 한 동안 침묵하던 그는 2003년 대구로 학교를 옮기면서 뉴욕에서 작업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시간의 끝’, ‘원더랜드’와 같은 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55나 665타입의 폴라로이드 필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현상과정에서 약품이 흘러내린 자국이나 먼지, 스크래치 같은 것들이 사진에 독특한 시각 효과를 더해주었다. 이것은 그의 말을 빌리면 우연히 발견한 대구의 달성이라는 장소가 갖는 여러 시간의 층위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얻어낸 효과라고 한다. 특정한 장소는 지금 이곳의 현실에 더해서 오랜 시간을 두고 쌓인 흔적과 체취를 내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달성공원을 담아낸 ‘시간의 끝’ 시리즈 이후 드라마 ‘야인시대’로 유명한 부천의 영화 세트장을 사진에 담아낸 ‘보이지 않는 기억’ 시리즈를 발표했다. 근대의 장면을 재현한 세트장은 대상으로서는 실재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부재하는 허구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인지 그는 이후 아예 근대건축 자체를 대상으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대상으로서 근대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은 2005년부터 3년 가까이 공간이라는 건축전문지에 연재된 모던스케이프라는 포토에세이를 통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진 분야보다는 오히려 여러 건축 관계자로부터 호평을 받아냈다. 이러한 일관된 관심이 이어져 2006년 강원다큐멘터리 지원작가로 선정되는 성취를 이루어냈다. 발표가 난 후 같이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Vestige 213cs, 2008

Vestige 213cs, 2008

그가 MS 시리즈라고 종종 표기하는 ‘자취 vestige’ 시리즈가 그것인데 나는 과거의 대상에 대한 관심이 보다 직접적인 표현으로 변모한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작업은 모노톤에서 컬러사진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 나 역시 컬러작업에 천착해온지라 그의 이런 변화가 못내 궁금해서 사석에서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침착하고도 논리적으로 사적이며 모호한 기억의 경험된 풍경에서 사회적 풍경으로의 변화라고 설명해 주었다. 특히 역사적 기억의 환기를 강조하던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의 MS 시리즈는 근대건축이라는 대상을 익숙함의 미적 체험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의 내밀한 일상의 기억을 자극하는 보편적인 감성이 사진에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라는 거대 사실을 내포하는 근대건축은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일상적 심리로 다가온다. 그의 작품에서 근대건축은 단순히 오브제로서가 아니라 일상적 시간과 의식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2008년 ‘자취’라는 사진집으로 정리해낸 그의 근대건축 작업은 지역에서 개최된 전시 때문인지 작품이 갖는 성취에 비해 반향이 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동시대 쟁점에 대한 지나친 의식이 그가 갖고 있는 감성을 다소 지워내고 있는 듯해서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사석에서 오랫동안 그가 강조해 왔던 소멸되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근대건축을 대상으로 한 ‘자취’ 시리즈 이후 그의 작업을 몇몇 기획전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근대건축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다큐멘트가 갖는 시각적 설명이기 보다는 간결한 그림으로 대상의 본질에 다가선 느낌이었다. 최근 그는 지난 사진작업의 여정을 깊게 반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몇 년간 드러나는 활동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대화를 통해서 나는 그가 얼마나 새로운 작업을 열망하는지 또한 그 방향에 대해 숙고하는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자의 역할과 작가로서 진지한 작업이 병행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는 그에게 애정이 담긴 지지를 보낸다. 그가 자신의 작업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대학의 과도한 실적경쟁이 작가의 창조력을 급속히 고갈시키는 현실을 잘 알지만 이를 현명하게 극복하고 머지않아 그가 새로운 작업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깊게 다가올 것을 굳게 믿는다. 

박성진 <익숙지도 낯설지도 않은 근대의 풍경, 자취 Vestige 서문> 2008년

익숙지도 낯설지도 않은 근대의 풍경

박성진 | 건축이론

예술은 일면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의 문제다. 작가의 사물과 의식, 행위는 이 문제에 부딪히면서 예술의 지위와 그 좌표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현대미술은 익숙함보다는 낮설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이 중에서도 '탈문맥'이 주요한 형식으로 다뤄지고 있다. 탈문맥은 하나의 사물이 가진 영역과 경계를 훼손시키고 의미를 모호하게 해 그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놓는다. 뒤샹이 변기의 익숙한 조형을 낯설게 만들었던 것은 탈문맥의 조건에서 출발한 것이고, 이것은 사물을 넘어 의식과 개념의 문제로 미술을 끌고 들어왔다. 과거 모더니즘의 예술은 이 '낯설게 하기'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서 되묻고자 한 것은 낯설음이 아닌 익숙함이다. 미술의 사조는 익숙한 것을 더 익숙하게-익숙한 것을 익숙지 않게-익숙한 것을 낯설게 등으로 이어왔다. 점점 낯설음이 미학적 수완을 발휘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낯선 익숙함이 좋다. 익숙한 것이 아름답다. 왜냐면 익숙함은 그 사람의 일상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좋은 이유가 그러하다. 배경음악 없이 흐르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감정 몰입을 의도적으로 강요치 않고, 또 일상적 화면구성과 언뜻 상투적인 스토리는 영화라는 별개의 공간을 구축하지 못한 채 내 일상의 심연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의 영화는 우리의 평범하고 건조하고 지루한 삶과 너무 닮아있다. '해변의 여인'이라는 영화 제목이 너무 진부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제 그 진부함과 상투적인 것이 좋아졌다."라고 감독은 답했다.

    건축물과 공간을 소재로 한 현대사진의 한 경향은 탈문맥적 상황을 통한 순수한 조형성과 이미지성의 표현이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군의 사진작가들이 순수에 매료되어 이미지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치밀하게 짜인 화면 구성 속에서 건축물의 입체는 화면을 채우는 평면적 이미지로 전환되어 표현된다. 건축물이 함의하는 인간사회의 역사와 문화, 시간성, 장소성은 탈색되고 건축은 순수 오브제로 등장한다. 익숙했던 일상적 공간과 콘텍스트는 저만치 물러나고 화면에는 우리의 일상과는 낯설어진 예술의 순수성을 간직한 오브제가 그려진다. 이는 매우 매력적인 사진임은 분명하다.

    이주형의 사진은 정면성과 이미지성을 피해가고 있다. 정면을 포착하더라도 그것은 순도 높은 이미지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간의 깊이, 시간, 기억, 장소를 담는 풍경이 된다. 이때 이주형의 사진도 홍상수의 영화와 마찬가지다. 낯설음이 아닌 익숙함으로부터 미적 체험이 야기된다. 우리의 내밀한 일상의 기억을 자극하는 보편적인 감성이 사진에 드러난다. 이주형의 사진은 역사라는 거대 사실을 내포하는 근대 건축물을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일상적 심리로 담아내고 있다. 상징화되거나 기념화되거나 과장되지 않고, 문맥을 벗어나지도 않는다. 달성공원과 놀이공원을 모노톤으로 찍은 이주형의 지난 작품에서도 장소와 그 역사는 미적 구도와 거대담론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개인의 낱낱한 기억과 일사에 스며들었다.

    이번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근대라는 시기 또한 이주형의 이런 특성과 어울리고 있다. 근대는 전통과 현재, 우리의 먼 과거와 오늘을 이어주는 가교로 볼 수 있다. 근대는 단절된 완료형 시제가 아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진행형의 시제이다. 하지만 우리의 근대는 불안하고 온전치 못하다. 그래서 근대는 우리에게 익숙지도 낯설지도 않은 시대이다. 근대에 대한 경험이 유년기의 기억으로 흐릿하게 남아있는 이주형에게는 더욱 그럴 수 있다. 타의적 수용과 질곡의 역사를 가진 근대의 건축물들은 이주형의 사진처럼 익숙지도 낯설지도 않은 풍경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근대의 건축물들은 오브제로의 횡포를 포기하고, 일상적 시간과 의식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이는 혹시 그가 영화로부터 사진을 시작했기 때문일까?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공간성과 시간성이 그의 사진 작업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예술가는 누구인가? 실재의 형이상학 사이 어디즘에 서 있는 사람이다. 만질 수 있는 세계와 만질 수 없는 세계 사이가 예술가의 영역이다. 이곳에서 예술의 초월성은 결코 일상성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것, 익숙한 것이야말로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보편성의 추구와 같은 야심은 가식이나 수사로 빠져 버리기 쉽다. 많은 예술가가 이 같은 오류를 겪는다. 다른 장르와는 달리 사진은 형이상학보다는 실재에, 만질 수 없는 세계보다는 만질 수 있는 세계에 근접한 예술이다. 사진은 본래 낯설음보다 익숙함에 충실했다. 하지만 사진이 예술적 지위를 확보하는 한 방편으로 낯설음에 관심을 돌린 지금, 이주형의 사진을 통해 역으로 그 같은 사진들이 얼마나 냉소적이던가를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