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을 두른 특별한 모험

이주형의 <Bloom and Boundary>는 이 사진가가 벌인 최근 몇 년간의 작업을 함축한 전시다. 나는 이전에 작가의 예전 작업에 관해 길거나 짧은 평문을 몇 번 썼다. 이제 이렇게 바뀐 작업을 마주한다. 허나 바뀌었다는 말은 작품의 첫인상일 뿐이며, 따져보면 모든 연작은 한 심지에서 갈라져 나온 연작이다.

지나간 디케이드에서 그의 사진은 실내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관찰이었다. 창틀과 블라인드가 격자 구실을 하며 경관 구도나 색채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던 그 작업의 중심은 빛이었다. 이후 작가는 풍경의 실체 앞으로 다가섰다. 매 컷이 담은 장면은 세계로부터 오려낸 최적의 스케일과 포커싱 탐구의 결과치다.

작가는 자기 사진에 관한 설명이 감각보다 좀 더 높은 인식의 층위에 머물길 원한다. 지금 그에게 사진은 단지 눈으로 보고 감에 따라 셔터를 누르는 일이 아니다. 감각과 시선에 더해 카메라를 든 채 머무는 장소도 중요하다. 그에게 현재형의 사진은 피사체와 사진가가 함께 있는 공간의 흔적을 잡아채는 과정이다.

이건 말이니까 쉽지, 물증의 정황이 아닌 탓에 사후 기록만을 보는 비평가들로서는 해석을 위한 해석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나는 이 전시에 부친 한 페이지 분량의 작가 노트를 봤다. 여기엔 실수라고 보기에 어려울 만큼 일관된 특징이 있으니, 바로 ‘나’라는 일인칭 주어를 뺀 서술이다.

그의 사진도 텍스트와 같은 결을 이루고 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작품에는 작가가 얽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직업으로서 예술 과업, 다른 예술 장르에 대한 애착, 사회 현실에 관한 소견 같은 주관적 서사가 재료로 쓰이지 않았다.

최근 사진 담론에서 꽤나 뚜렷한 한 가지 흐름이 있다. 그것은 거대한 사건 주체를 배제하여 공허한 장소만 촬영하고, 사진에서 미룬 사실을 별도의 필기나 언술로 확장하는 식의 작업이다. 이주형 작가는 그런 세미 르포르타주를 달가워하지 않는 데다가, 설령 집요한 관찰자가 그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더라도 차이와 반복으로 구성한 이 프레임 속 현상은 그 시도를 주저앉힐 것이다.

이 전시는 서로 다른 두 시리즈의 합이다. 응시점이 멀게는 하나의 진달래 군락을, 가까이는 빛이 투과되어 속이 비치는 진달래 꽃잎을 담은 <Bloom> 연작이 있다. 다른 하나는 수변 풍경이라는 그곳, 발길이 닿은 그때를 포착했다. 바로 한 주체가 심적 상태 속에 이미지와 소리와 촉각과 냄새라는 객체적 현상을 영접하려 애쓴 <Boundary of Senses>다.

관람자들은 각각 십여 개로 쪼개어 벽에 줄지어 놓은 꽃 사진, 풍경 사진을 하나씩 훑어야 한다. 촬영지가 어디인지라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불평이 나올 만하다. 그렇지만 몰라도 상관없고, 또 몰라야 창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산다. 공간과 빛과 생체 감각의 순도 높은 결합 과정에 다른 정보가 얹히면, 몰입이 깨질 테니까.

전시장을 찾는 많은 관객에게 <Bloom and Boundary>를 감상하는 문턱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갤러리 주변의 들뜬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조용한 광경이 사진으로 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필름 사진들은 단수 높은 사진 애호가나 평론가에게는 만만찮은 벽이다.

같은 도시에서 진행하는 사진 비엔날레처럼 예술의 가치를 매기는 절차는 업종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업계 전문가조차 이주형의 유니버스를 매개하고 평가하는 데 난이도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담은 풍경의 연속성, 군락으로 이룬 집합이 맥락을 생산하는 전시 형식이 굿 스페이스에서 실현되었는데, 단지 몇 점을 선별해 보여줌으로써 컨텍스트를 제대로 살리기가 쉽진 않을 듯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이 있으니, 그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광채를 드러낼 것이다. 결정한 작업의 동기가 그 광원이다. 평범을 외피에 두른 듯하나 실은 특별한 현전의 징후인 그의 사진은 스스로 택한 실천이 먼저였다. 실내에서 사색하고 관찰하던 작가가 자신을 스스로 밖으로 끄집어 보낸 사건은 이렇게 미흡한 내 글로라도 기록할 만한 중요한 일이다.

물론 이 창작이 한 가지 이끌림으로 시작했을까? 그럴 리가.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예컨대 사진 예술이 미니멀리즘과 단색 회화의 잔치 속 장식품처럼 취급되는 것과 선을 긋겠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두 사진 연작은 몇 가지 소재로만 생생한 감각을 집중하고자 한 대담한 시각 예술이다.

(윤규홍, 미술비평/예술사회학)

Bloom and Boundary

감각과 시선으로서의 사진

오랫동안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앞에 나 자신이 어떻게 머물 것인가에 더 관심이 있었다. 사진작업을 오래 해오면서 대상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감각과 시선이 작업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Bloom은 여러 해 동안 진달래가 피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이어온 작업이다. 처음부터 특별한 의미를 두고 진달래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꽃잎이 빛을 받아들이고 머금는 방식이 눈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다. 이내 반투명한 꽃잎을 매개로 눈앞에서 지각되는 빛과 형태의 흔적을 사진 안에서 어떻게 다시 구성할 것인가를 모색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지를 가늠하며, 그 순간의 시각적 경험을 사진에 담고자 했다.

 Boundary of Senses는 습지와 호수, 계곡 등에서 이어온 작업이다. 물과 땅, 수면과 반영, 가까운 것과 먼 것이 한 화면 안에서 만나면서 공간의 경계가 잠시 모호해지는 때가 있다. 나는 그러한 장소에서 눈앞의 공간이 잠시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에 주목했다.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살갗에 닿는 바람과 온도, 습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처럼 눈으로 포괄되지 않는 감각들이 하나의 장면에 함께 묻어난다.

 두 작업의 대상과 계절은 다르지만 작업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장면을 미리 정해두기보다 그곳을 걷고 머물면서 빛의 감각과 시선의 변화에 반응한다. 때로는 역광 속에서 형태가 희미해지고, 때로는 초점 밖의 공간이 화면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중심보다 주변에, 명확한 형태보다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관계에 시선이 머문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더라도 같은 풍경을 만나기는 어렵다. 빛과 계절이 달라지고, 그곳을 바라보는 나의 감각도 조금씩 달라진다. Bloom과 Boundary of Senses는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시작되었지만, 무엇을 보고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되묻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왔다.

 사진을 찍는 일은 내게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라기보다 계속 보고, 머물고, 다시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이번 전시는 그렇게 이어져온 두 작업을 한자리에서 마주해보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