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옥 <이주형 '플로라'전> 대구신문 2021년 6월 22일

<대구신문 2021년 6월 22일>

이주형 ‘플로라’전

황인옥 기자

사진가로 활동하며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이주형이 갤러리 토마 개인전에 꽃을 소재로 한 작품 ‘플로라(flora)’ 연작들을 걸었다. 선홍빛 진달래와 벚꽃들을 작가만의 감수성으로 녹여낸 사진들이다. 그런데 대학 교수라는 직함이 준 선입견 때문인지 그의 꽃 사진들을 보면 약간의 의문이 일었다.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사진을 기대했지만, 막상 전시장에 걸린 사진들은 의외성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꽃 특유의 화려함과 들뜬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소담스러움으로 수렴했다는 노련함은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지만, ‘꽃’이라는 소재가 마음에 걸렸다. 흔히 ‘꽃’은 아마추어 사진가에게 각광받는 소재라는 인식이 강해서였을 것이다.

“이지적인 사진을 기대했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미지만 놓고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태도면에서 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각성한 고양된 감각의 결정체”라며 “‘꽃’ 사진은 지성과 감각의 혼연일체에서 나온 결과”라고 작품 속에 녹여낸 작가정신을 언급했다.

사실 이주형 하면 ‘라이트 플로우(Light Flow)’ 연작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빛을 머금은 창문 가리개, 블라인드, 커튼, 창틀, 가림막 등의 건축적인 격자무늬 소재들을 회화의 질감과 흡사한 서정(抒情)으로 풀어낸 작품들이다. 격자무늬 패턴은 기하학적인 추상의 틀을 의식하고 찾은 소재들이다. 그에게는 격자무늬 자체보다, 가림막 너머에 어른거리는 먼 산의 실루엣이나 빛이 넘어가면서 머금은 자국들이 더 중요했다. 가림막 너머의 잔상들은 작가가 대상을 호흡하며 포착한 감정선들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태도를 “지각현상학”에 비유했다. 지각현상학은 인식이전의 세계, 즉 의식의 작용 이전에 주어져 있는 현상의 세계로 복귀함이 핵심이다. 지각현상학의 출발점은 의식이 아닌 신체였다. 신체의 감각을 세계로 열리는 장소로 인식했다. 이주형 역시 지각현상학을 따랐다. “나의 사진들은 아무도 없는 이곳, 이 시간대에서 나의 오감의 감각들이 곤두서고 극대화된 결과다.”

격자무늬 소재가 꽃으로 변화한 시기는 2년 전이다. 소재의 변화는 격자무늬 소재가 주는 한계로부터 촉발됐다. ‘라이트 플로우’에서는 건축적인 요소에서 격자무늬 소재를 찾는 일이 사진 촬영 못지않게 중요했다. 대상의존성이 깊어질수록 대상을 찾는 일에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졌다.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 그에 부합하는 장소를 찾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원하는 빛의 농도를 얻기 위한 환경까지 신경을 써야했다. 오래하면 분명히 지치는 순간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어느 날, 그토록 매달렸던 소재에 대한 열망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생각하게 되었고, “작가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됐다. 그때 “이제는 스스로 즐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가슴 밑바닥을 치고 올라왔다.

변화는 태도와 방법론에서 각각 진행됐다. 태도적인 측면에서는 작가 스스로 작업 과정 자체를 즐기는 작업을 하려는 의지가 강해졌고,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우선 스스로 즐기는 작업을 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소재에 대한 열망을 내려놓기로 했다. 격자무늬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소재들과 작별을 고하고, 그야말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들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 소재들이 꽃이나 풍경 등이었다.

말하자면 “목적지향에서 과정지향으로의 변화”였다. 목적지향이 좋은 결과물을 지향한다면, 과정지향은 대상과 충분히 교감하고 대상이 가진 호흡이나 심성을 작가의 손맛으로 오롯이 카메라에 담아내려는 작가의 혼신의 투혼 과정에 대한 지향을 의미한다. “이제는 작업 과정을 즐기는 것에서 작가로서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졌다.”

아날로그 카메라를 다시 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디지털 카메라는 카메라 스스로 피사체의 상황들을 조정하는 기능들을 탑재해 있어, 작가의 디테일한 손맛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아날로그 카메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는 대상을 스스로의 감성으로 접근하고, 그 감성을 온전히 사진에 포착하고 싶었다. 1960년대에 제작된 렌즈가 부착된 빈티지 필름 카메라를 구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날로그 카메라는 사진 한 장을 찍으려면 적어도 5분 동안의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프로세스가 불편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그 불편한 지점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나의 역할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꽃이나 풍경 사진은 시각적인 결과물이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프로 사진가라면 대상에 대해 시각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꽃이나 풍경이라는 대상에 이입해 사진예술로 표출하는 것이 해당될 것이다. 작가 역시도 그랬다.

그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꽃이라는 대상보다 꽃이라는 현상을 경험하며 내가 겪는 각성의 지점”이라며 “꽃은 매개체이고, 진짜는 대상을 통해 극대화된 나의 각성된 감각”이라고 언급했다. 그 점에서 격자무늬나 꽃은 소재의 차이일 뿐, 그가 추구하는 작가로서의 태도에서 보면 동일하다. “내가 살아있음에 대해 각성하게 만드는 시지각의 미시 요소를 관객이 공감해준다면 아주 내가 성공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문혜진 <photo, minimal 전시 서문> 2018년 12월

<photo, minimal> 전시 서문

갤러리 룩스, 2018

미니멀한 사진이란 무엇인가

문혜진(미술비평)

대략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정작 그 실체가 무엇이냐를 물으면 명확히 답하기 곤란한 개념들이 있다. 외형적 유사성은 존재하나 기원이 불분명하고 하나의 사조나 흐름으로 묶기에는 공통점이 없을 때, 보통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 미니멀 사진이라는 용어 또한 그러하다. 흔히 모더니즘 건축의 기하학적 파사드나 대상의 일부를 추상적으로 찍은 사진을 지칭하는 이 용어는 ‘미니멀’하다는 용어의 다의성이 ‘사진’이라는 특수한 매체와 결합하면서 그 모호성을 더하는 듯하다. 우선 미니멀이라는 의미부터 살펴보자. 어원적으로 미니멀은 최소화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런 고로 미니멀하다는 표현의 표면적 의미는 재료나 형태, 구성에서 단순화와 최소화를 추구한다는 뜻이고 그것이 단위 요소의 반복, 몬드리안식 대칭과 리듬, 기하학적 미, 추상성과 규칙성, 직선적이고 명료함 등의 외형으로 표출되며, 나아가 이와 같은 형식적 요소를 배태한 맥락(현대성, 모더니즘의 합리주의, 이상주의)과도 연계되는 확장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미술에서 하나의 사조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미니멀리즘’의 존재다.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 모리스(Robert Morris)의 주도 하에 1960년대 중후반 태동한 미니멀리즘은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미국식 모더니즘의 계승이자 전복으로 태동했다. 아방가르드를 키치와 구분하기 위해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했던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은 미술적이지 않은 요소를 미술에서 제거하는 부정의 방법론으로 귀결되었고, 이는 캔버스 위에 발린 물감으로 상징되는 이야기와 형상이 제거된 추상 색면 회화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재현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그린버그의 엄격한 청교도적 방식은 모노크롬 평면이라는 종착점 이후 나아갈 길을 잃게 된다. 저드가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s)”이라는 회화도 조각도 아닌 제3의 개념을 제시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실제 공간인 3차원의 사물은 환영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반(反)환영주의라는 모더니즘의 기치를 계승하면서도 회화의 사각 틀을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하고 구성의 위계를 없애려는 미니멀리스트들의 의도는 최대한 단일한 형태와 중심이 없는 병치(one after another) 구조라는 미니멀리즘의 외형적 형태를 낳는다. 단순한 큐브가 줄줄이 나열된 저드의 작업은 미술에서 형태적, 은유적 환영을 제거하기 위한 이론적이고 논리적 사유의 결과였으므로, 보통 단순히 기하학적인 외형과 결부되는 미니멀이라는 말의 통상적 사용과는 실상 상당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가깝게는 단순성, 규칙성, 추상성, 반복 같은 외형적 특징에서부터 멀게는 사물성, 연극성, 현존성 같은 이론적 개념까지 확장되는 미니멀이라는 단어는 사진과 결부되면서 어떤 효과를 낳는가. 사진의 범주 또한 무한히 넓으니 어떤 사진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photo, minimal>(갤러리 룩스, 서울 2018)에 참여하는 김도균, 박남사, 이주형, 황규태의 경우 미니멀은 표면적으로는 추상이요 태도에 있어서는 보이는 것 너머의 어떤 근원을 추구함을 의미하는 듯하다. 여기서 미니멀은 대상을 재현한다는 사진의 본재적 목적을 넘어선 탐색을 뜻한다. 모든 사진은 원론적으로는 구상이다. 대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taking)’ 사진의 본성상 사진에 찍힌 모든 대상은 실재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그렇기에 사진으로 비재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모순을 동반한다. “모노크롬 사진은 현실의 추상이며, 실재와 추상이라는 모순되는 두 항이 혼재하는 역설의 이미지”라는 박남사의 말처럼, 재현 너머를 추구하는 사진은 구상이면서 동시에 추상이기에 자신의 기원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초월의 의지이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진의 경계를 넓히는 매체 탐구가 된다. 이들 사진가들은 모두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육안으로는 불가능한 추상적 이미지를 도출해낸다. 때로는 점, 선, 면이라는 기본적 조형 요소의 구성미를 탐색하기도 하고, 재현과 비재현, 표면과 깊이의 공존을 탐구하기도 하며, 시각성을 넘어 촉각적이고 물질적인 경험을 유발하거나, 아예 21세기 이미지의 기원인 픽셀의 세셰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때 비재현적인 어떤 속성을 도출하는데 카메라와 사진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가 각 사진가의 작업을 해석하는 핵심이요 <photo, minimal>에서 ‘미니멀한 사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이주형의 사진은 참여 작가 중 구상이라는 사진의 본성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작업일 테다. 가림막 혹은 블라인드의 일부를 확대해서 찍은 그의 사진은 적당한 정도의 클로즈업으로 인해 대상의 형태가 유지되며 피사체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는 세부(가림막을 올리고 내리는 볼 체인, 창문 틀)가 포함되어 있어 보는 자로 하여금 이미지의 출처를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의 사진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진가가 가림막을 가림막으로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주형이 실체로서 가림막을 재현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진의 지향은 블라인드의 표면인가, 흐릿하게 드러나는 그 너머의 풍경인가, 그도 아니면 블라인드 너머로 스며 나오는 빛인가.¹ 초기의 사진이 바깥 풍경으로 대변되는 구상과 격자로 대변되는 추상을 비슷한 비중으로 공존시켰다면, 이번 전시에 출품된 근작들은 외부 풍경을 최소화하고 창틀과 블라인드가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리듬과 그 사이를 침투하는 빛의 자국에 집중한다. 일차적으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화면을 분할한 격자 구성이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크고 작은 직사각형들이 만들어내는 분할의 리듬은 몬드리안식의 화면 구성의 묘를 더한다. 이를 위해 사진가는 화면의 프레이밍, 빛의 점진적 차이에 따른 명암을 섬세하게 조율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격자가 질서와 반재현, 체계를 상징하는 모더니즘의 “침묵에의 의지(will to silence)”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열어젖히는 것이 이 사진들의 독특함이다. 이주형이 찍는 것은 “카메라라는 기계의 힘을 빌어서 생체 감각의 차우너으로 침투시키는 빛의 이미지”²다. 이주형의 격자들은 기하추상의 차가움이 아니라 마크 로스코(Mark Rothko)나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그림처럼 떨리는 빛의 진동을 전달한다. 창틀의 윤곽을 따라 떠오르는 초록색 십자가의 형상이나 투과되는 빛의 광량에 따라 짙어지는 노란색의 계조는 마음을 가라앉힌 평정의 상태에 도달할 때 얻을 수 있는 고요함과 명상의 느낌을 불러온다. 실제로 작가는 촬영 당시 자신을 고양시킨 신체적 감각과 현존을 일깨우는 광휘를 관객에게 전달하기를 의도한다.³ 공간에 둘러싸여 신체적으로 느낀 감각을 사진이라는 평면적이고 시각적인 매체로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디지털 작업을 통해 명암과 선예도, 채도를 강조한다. “디지털 변용을 통해 증폭된 빛의 질감”(작가)은 시각을 매개로 한 공감각적 환영을 일으킨다. 여기서 사진은 빛의 감각이 관객의 몸을 관통해 스며드는 촉각적이고 현상학적 체험으로 인도되는 초월적인 매체가 된다.

<중략>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느 범위를 넘으면 사진이 아니라고 할까.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⁴ 어쩌면 황규태의 질문은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모두의 작업에 적용되는 핵심 논제일 것이다. 사진이면서 사진이 아닌 것, 사진 이후의 사진, 사진을 뛰어넘는 무언가는 사진의 전통에 발을 디디고 있되 21세기의 시각 환경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진가들 공통의 화두다. 실재를 내포하면서도 보이는 것 너머로 나아가는 미니멀 사진의 탐색은 그런 점에서 사진의 경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이 굳이 카메라를 경유할 필요가 없음에도 카메라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은 생각해볼만한 지점이다. 구상 이미지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는 이주형을 제외한 세 작가들의 사진은 외견상 비(非)촬영 이미지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 중략 ···> 그럼에도 이들이 카메라라는 시발점을 벗어나지 않으려하는 것은 개념의 측면도 있겠지만 사진 매체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사진이 아닌 ‘이미지’를 이들 사진가들이 어떻게 수용하고 체화하는지가 향후 사진의 미래가 아닐까.

1 손영실, 「이주형 Light Flow」, 『월간미술』, 2016년 10월호, 172쪽

2 이주형 작가의 말. (윤규홍, 「집 안에 갇힌 남자」, 『Light Flow』, 갤러리 분도, 2016 재인용)

3 이주형 작가 노트, 2016

4 황규태, 『황규태』, 열화당 2005, 18쪽

윤규홍 <이주형, '빛의 시선' 전> 매일신문 2018년 10월 11일

<매일신문 2018년 10월 11일>

이주형, '빛의 시선' 전

윤규홍 |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 예술사회학

학식이 깊은 분들은 평론에 맞는 글을 적절하게 인용한다. 난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오늘은 쓸 수 있다. 오후에 영화학 강의를 하면서 발터 벤야민이 썼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가르쳤던 게 머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구가 있었다. “화가는 앞에 놓인 대상으로부터 자연스러운 거리를 유지하려는 반면, 카메라를 든 사람은 작업할 때 대상의 세세한 조직까치 파고든다. 화가가 완성한 이미지는 전체적인 상이며, 사진가의 이미지는 여러 개의 단편적인 상으로, 이런 낱낱의 영상은 새로운 원칙에 따라 다시 짜 맞춰진다.”

    벤야민의 이런 분석은 80년 전에 나왔고, 시각 예술은 이후에 바뀐 것도 많다. 극사실주의 회화는 카메라의 힘을 빌려 기계보다 화가의 손재주가 여전히 우위에 있단 것을 뽐냈다. 모호한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 부분의 얼개에 얼마나 집착하는 추상단색화는 또 어떤가. 한편 사진 또한 더 이상 사진이 아닌 것 같은 뭔가가 되어버렸다. 물론 순전히 찍은 그대로의 상이 맺힌 사진만이 기록의 가치로 평가받던 시절 이전에도 예술로서의 사진을 시도한 최초의 움직임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픽토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딱한 사연이 깔린다. 솜씨가 그다지 없던 화가들이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서 이런저런 수를 썼다. 그들은 붓 대신 카메라를 들고 찍은 사진들을 겹치고 붙이고 여기에 또 붓질까지 더해서 사진인지 그림인지 분간이 안 가지만 좌우지간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던 노력이 있었다.

    사진작가 이주형이 펼치는 세계 또한 계보를 따라가면 픽토리얼리즘에 닿는다. 그의 디지털 픽토리얼리즘은 모욕이 아니며, 그렇다고 뻔한 찬사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단색화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그림과 사진의 경계가 지워진 게 이주형의 작업이다. 이같은 그의 사진은 한국에서 거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단계에 올라 서 있다. 작가는 빛의 몰입(Light Flow)이라는 제목을 붙이는데, 이유가 있다. 그는 창문 너머에 놓인 자연을 찍는다. 왜 창에는 저마다 블라인드나 커튼도 같이 드리워져 있지 않나. 이런 가림막 때문에 창밖 풍경은 희미하게 비칠 뿐이다. 그 모든 것은 햇살에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사랑하는 이를 대할 때 그를 둘러싼 희뿌염과 밝음과 보배로움이 하나가 되어 내게 다가오는 순간. 작가도 그런 순간을 맞기 위해 피사체를 앞에 두고 몇 시간 동안을 기다리며 빛의 조락을 살핀다. 시어적 표현이지만 그는 빛이 머금은 질감 안에 머문다. 그것을 몰입(flow)이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다.

손영실 <이주형 Light Flow> 월간미술 2016년 10월호

<월간미술 2016년 10월호> 

Crtic, 전시리뷰: 이주형 Light Flow

9.5~10.1 갤러리 분도

손영실 / 경일대 교수

 

이주형의 사진에서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블라인드이며 그것은 형태와 색상에 의해 서로간의 차이를 드러낸다. 블라인드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형상들은 그의 사진을 좀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볼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관해 관람자에게 선택의 관문을 열어둔다.

lf, Ia-49, 2015

lf, Ia-49, 2015

블라인드의 표면에 머물러야 할지 좀 더 세심하게 블라인드 사이에 머물러 있는 빛에 집중할지 혹은 흐릿하게 형상으로만 드러나는 블라인드 너머의 풍경에 시선을 둘지 말이다. 관람자에게 부여된 자유로움에 관한 용인은 어쩌면 처음부터 그가 바라봄의 대상을 명료히 상정해 두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일종의 거리두기 전략일 것이다.

    시간대를 달리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촬영한 블라인드를 나란히 배치하거나 널찍한 면의 분할을 색면으로 채우는 그리드로 가득한 그의 사진은 마치 슬로 비디오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작품 감상 태도를 요구한다. 언뜻 표면을 스쳐가듯 본다면 그의 사진에 침잠해있는 이미지를 볼 수 없고 시간의 지속 속에서 가만히 표면을 응시하고 있어야만 가려진 이미지들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그가 긴 노출을 준 시간만큼 축적되어 있던 빛이 형상을 점차 드러나게 하는 원리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특정한 시공간으로 이뤄진 물리적 현실을 망각하고 늦춰지거나 빨라지는 시간의 변이 속에서 공간적-시간적 사건에 관여한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회화에서 색면이 서로 다른 색의 중첩을 통해 간섭작용을 일으킨다면 이주형의 사진은 같은 색면을 가진 블라인드의 잘린 면들 사이로 빛이 침투하여 특정한 시공간을 지워내고 시간과 공간의 유동적 관계를 만들어낸다. 또한 그의 사진에 나타난 거친 색 입자들은 이 사진이 현실의 산물임을 확인시키며 빛과 색의 대상을 떠나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되는 신체에서 발견되는 객체(objet trouvé)를 인지하게 한다.

    블라인드는 재현적 특성과 비재현적 특성을 매개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 자연의 재현이 아닌 시각적 경험을 화면에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가운데 회화가 평면 위에 그려진 그림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각형의 블라인드가 카메라의 사각형 프레임의 메타포 기능을 함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사진에 보이는 시각적 대상은 사진가의 프레이밍 행위에 의해 선택된 단편이며 외부의 현실은 사진적 무의식에 관여되며 사진에 영향을 끼친다.

    디지털 사진의 등장 이후 더욱 첨예화된 포스트 포토그래피 논쟁은 전통적 사진을 견고히 지탱해 온 사실적 재현의 패러다임 붕괴로부터 기원한다. 이것은 사진에서 리얼리티 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사진으로 작업하는 현대 작가들은 카메라를 재현의 도구만이 아니라 개념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적극 사용하며 새로운 감각의 흐름, 방법론적 실천을 보여준다. 제프 월(Jeff Wall)이 자신을 사진가(photographer)가 아닌 인포그래퍼(infographer)로 불러줄 것을 요구한 것처럼 말이다. 시각 중심주의의 부정에 기반을 둔 비재현 회화의 등장이 재현을 넘어서는 현대의 사유를 확인시켜주듯 사진이 재현의 논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들뢰즈(Gilles Deleuze)의 사유에 나타나는 방식, 즉 이성논리에 의한 인식론적 접근이 아닌 감각에 기대어야 한다.

    이주형은 사진이 적어도 현실의 흔적임을 확인시켜주지만 비개성적 방식과 불확실한 흐름 속에서 개개인이 스스로의 자각을 고양시키도록 독려하는 방식을 통해 사진의 이형(variant)을 개척한다.

석현혜 <작가 인터뷰> 사진예술 2016년 10월호

<사진예술 2016년 10월호>

Light Flow 이주형

석현혜 기자


어둠 속에서 신의 모습은 단일하지만, 빛 속에서는 신의 모습이 다양하다.

In darkness the One appears as uniform: in the light the One appears as manifold.

- 타고르, 길 잃은 새 中

 

이주형 작가의 개인전 <Light Flow>가 대구시 중구에 위치한 갤러리분도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신작 시리즈는 빛 자체가 아니라, 가림막을 통해 번지는 빛의 자국을 사진으로 담았다. 1,2층으로 나눠진 전시장에는 총 16점의 작품이 걸려있는데, 전시 공간 안에 새로운 창을 내듯이 계산된 구도로 배치돼서, 그 자체가 가시화된 빛의 체험 공간이 된다. 각 작품들이 개별로 존재하기 보다는, 서로 짝을 이루면서 걸려있는데, 특히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변화를 다운 연작 사진들이 나란히 걸려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의 작품에서는 빛의 자국과, 빛의 변화, 또 가림막을 앞뒤로 한 외부의 빛과 내부의 빛이 서로 다르게 짝을 이루고 있다. 그 미묘한 차이에 따라서, 빛과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찬찬히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이전 작업에서는 격자와, 가림막, 외부 풍경 등이 많이 담겼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가림막과 빛에만 집중한 느낌이다. 변화한 이유가 있는가?

  이 작업은 2013년부터 4년 정도 해오고 있다. 이전 시리즈는 근대공간을 담는 작업을 했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 건축공간 안에 있는 빛에 주목하게 됐다. 작업은 처음 문제제기했던 데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건축물의 안은 사회문화적 컨텍스트로 집약된 문화공간의 실내이고, 밖은 자연으로 이를 대비함으로써, 그 사이에 하나의 Grid(격자)를 넣고, 이 안과 밖의 대비를 강조해 보여주려던 것이 원래 시작이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안과 밖의 접점, 그 자체와, 그 접점에서 보이는 빛의 자국에 더 빠져들게 됐다. 주로 특별한 장소를 찾아다니기보다는, 일상에서 머물렀던 공간에서 스케치를 하다가 그 중 내가 생각하는 그림에 부합하는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촬영했다. 카메라를 세워놓고 몇 시간을 관찰하고 기다렸다가 계속 찍다보니 변화가 나타났다. 

  지금 이 작업에서 격자 형태, 블라인드 형태로 등장하는 가림막은, 무대나 공연예술에서의 무대장치의 역할이다. 정작 주인공은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의 실루엣이나, 가림막에 비추는 야경의 불빛 등, 이런 빛의 자국이 주인공이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벽과 밤이 완전히 다른 빛의 자국을 만든다.  

윤규홍 아트 디렉터가 쓴 이번 전시의 서문에는 ‘집 안에 갇힌 남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작업 방식을 들어보니, 그 말 그대로 창문 안에 갇혀서 작업한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작업과, 스스로 충족감을 느끼면서 지속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은 좀 다르다. 나는 권부문 작가의 작업을 좋아하는데, 일상적으로 접하지 못하는 장소,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간- 세상과 대면하고, 찾아 헤매는 작업을 좋아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학에 몸담고 있어서, 그런 작업을 하기에는 여건이 제한적이다. 다만 이번 ‘Light Flow’ 작업을 해가면서 점점 같은 장면을 빛의 변화에 따라 반복적으로 촬영하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스타일을 비교하며, 스스로 즐기게 됐다고 할까. 그 기다림의 시간들을 좋아하게 됐다.

  어쩌면 나에게 더 맞는 작업방식일 수도 있고, 이 작업을 해가면서 작업이란 정말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떨어지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실감하니까. 명료하게 떨어지고, 정리된 것을 원한다면 논문을 쓰지.(웃음) 결국 작업이란, 어떤 문제제기를 던져놓고, 시각적으로 풀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변수들, 지속하며 나타나는 충돌의 결과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작업에는 어떤 변수들이 있었는가?

  박사논문 주제가 안드레아 구르스키였다. 구르스키의 작업은 얼핏 다큐멘터리 사진 같지만, 실상은 다 만지고 조작한 결과물이다. 디지털 변용의 측면에서, 우리가 보통 사진을 두고 현실의 자국이다, 인덱스다 그렇게 필름 사진을 두고 말하지만, 필름 그 자체도 현실 있는 그대로는 아니고 결국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냥 변형된 것이다. 컬러사진이나, 흑백사진들도 현실을 거쳐 고착되지만, 그 자체가 현실의 요소는 아니다. 네가로 찍으면 플랫하게 나오고, 슬라이드도 과장되고, 그런 기준이 있으니 현실 그 자체는 아니란거다. 오히려 디지털로 작업해서 고해상도로 디테일을 살릴수록, 그 과도한 실재감이 관객이 지각하는 수준을 넘어설 때, 상이한 감각을 준다. 

  가령 이번 시리즈 사진 중 하나는 캔버스에 얹혀 놓은 것 같다는 감상을 많이 들었다. 가림막의 질감이 극사실로 묘사되니까, 그런 착각이 나타나는데, 이처럼 과도한 실재감이, 내 관심과 의식의 반영되는 지점이다. 내가 가졌던 기준은 가림막이 있다면, 빛이 닿아서 어떤 자국을 만들고 있는데, 사실 일상에서 관찰하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과장해야만 그게 느껴진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서 그림자나 이런 것들을 조금 강조해 냈다. 

  안드레아 구르스키 작업에서처럼, 재현이미지가 일반적인 감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넘지 않게, ‘이것은 가공된 것이구나’라고 직접 다가가지 않도록 신경 썼다. 빛을 머금은 디테일들이 강렬하게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게끔 했다. 각 장소의 안과 밖, 조명의 차이, 조도의 차이, 톤의 조절 등은 그대로 유지해서, 이를 통해 드러나는 빛의 자국들을 강조했다.

전작에는 가림막 너머, 투과되는 풍경을 보여주었다면, 이번에는 은근하게 숨겼다. 왜 빛 그 자체에 주목하게 됐는가?

  가림막이 무대 장치같이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요소를 부여하고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냥 지나치지 않고 좀 더 오래 이미지 앞에 머물게 하고, 그럼으로써 빛의 자극을 의식하게 만들기를 바랬다. 그런 빛의 자국이 관객으로 하여금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던 빛의 감각을 일깨우게 하도록 말이다. 결국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빛인데, 빛은 보이지 않고 머물렀을 때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작업을 하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이미지 앞에 섰을 때 마치 빛이 나에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관객이 느끼기에 빛의 감각에 대해 각성함으로써, 평소 느끼지 못했던 현존의 감각 - 내가 여기에 있다는 고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두 가지 측면이 조금이라도 관객에게 전달되면 의미가 있다고 본다. 

빛의 감각을 각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안드레아 구르스키의 작업을 두고 여러 리뷰가 있는데, 그중 하나 좋아하는 리뷰가 있다. ‘구르스키 작업은 일단 거대하고, 시점을 이쪽에서 바라본 것과, 저 쪽에서 바라본 것의 소실점이 다르다. 때문에 관객은 거대한 작품 앞에서 대상을 바라보지만, 원근법이 교란돼있어서, 시각주체로서 시선이 닿지 못하고, 이미지의 표면 위를 시선이 부유하게 된다. 동시에 거대한 작품 앞에서 한 발자국 옮기면서, 그 교란되는 시선이 현상학적인 신체, 눈으로 보는 이미지가 아닌, 몸으로 보는 이미지가 된다’는 리뷰가 이 말을 정말 좋아했다. 구르스키의 작품을 눈으로 뭘 봤다가 아니라, 어떤 다른 감각의 차원에서 받아들인가는 말이다.

  관객에게 눈에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빛의 감각이라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을 의도했다. 공간 구조에서 빛이 떨어지는 것들을 보며, 적절하게 빛의 감각이 관객을 휘돌면서 다가갈 수 있다면, 눈만이 아닌 신체, 피부에서 체험하는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관객이 내가 둘러싸여 있구나 느끼는, 현존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앞으로 계속 이 시리즈를 작업할 예정인가?

  이 작업의 주인공은 빛의 자국이었다. 다음 작업도, 어떤 매개를 통해서 빛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일깨워 낼 수 있을지, 다른 방식으로 그런 것을 시각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 찾아보려 한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는 있는데 아직 구상 중이다.

교수이자 지도자의 일과, 작가의 일을 양립해가는 것은 어떠한가?

  작가는 자기 것만 이해하면 되고, 굳이 다른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가르치는 입장이란 내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동시대 예술사진의 쟁점과 경향을 다 알아야하고, 이런 것이 없으면 가르치기 힘들다. 나 스스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데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지 않나?

  또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만 집중해서,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부분이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교육자는 이타적이고, 작업을 두루두루 봐야한다. 좋은 교육자이자 작가를 병립한다는 것은 딜레마가 있지만, 결국 나는 작가는 ‘팔자’라고 본다. 어떻게 할 까, 고민하기 전에, 눈앞에 있으면 하게 되는 것이, 작가는 그냥 팔자니까.

  예술가의 문제해결 방식은, 어쨌든 지속적으로 내적동기를 찾아 헤맨다고 하지 않나? 작업을 하지 않는 고통이 최고조로 이르렀을 때 작업을 하게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