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섭 <침묵의 여행 서문> 1994년 11월

이주형의 풍경을 생각한다.

김장섭  |  사진가 

사진을 통해 풍경을 본다는 것은 그 사진이 찍혀진 장소, 즉 풍경의 오리지날리티를 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식으로 사진을 찍었든 사진이라는 수단을 통해 보여지는 풍경이란 사각의 평면에 정착된 영상이 전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풍경이라 부르는 그 모든 것이 존재하는 한, 또한 그것들로 인해 우리들의 상상력이 자극받고 있는 한 소위 풍경사진이라 불리우는 표현세계는 계속해서 사진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찍는자의 촬영행위로부터 시작되어 인화지 위의 영상을 이해하거나 감상해가는 과정, 즉 찍는자와 보는자와의 사이에 개입된 해석의 과정이 필요한 구조를 가진 매체이다. 현장에서 셔터를 누르는 자의 체험이 곧바로 그 영상을 경험하고 보아가는 자(관객)와 동일하게 유지될 것을 믿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어쩌면 찍는자와 보는자 사이에 개입된 제도나 문화적 길들임과 무관하지 않게 유지되는 구조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렇기때문에 이미 경험적 상식으로 치부된 영상을 통해 공리적인 합의를 이룬 것이라 하더라도 사진가의 의미부여와 감상자의 해석과 수용이라는 관계는 여전히 그대로 놓여있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서두에 밝혔듯 사진은 그 구조상, 풍경(혹은 피사체)을 구성하는 오리지날리티와는 오히려 무관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만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소위 사진이 스스로 새롭게 존립해 갈 수 있는 내용들을 가누어가는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진가의 이론과 테크닉과 체질, 혹은 감각같은 분명한 부분과 모호한 부분을 뭉뚱그린 총체를 지칭하는 것일게다. 한 장의 사진을 놓고 다양한 해석과 상상이 이루어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주형의 풍경사진은 그가 토로했던대로 풍경의 도큐멘트로부터 시작하여 이번 개인전을 통해 보여주는 매우 건조한, 풍경의 해석쪽으로 변모해오고 있다. 그리고 최근 그의 사진들에서는 소위 토포그래픽스라 불리우는 일련의 사진경향에 자극받은 바 있다는 점을 얼핏 발견하게 된다. 어디서부터 출발한 사진적 태도였든 이주형이 이번 개인전에서 다루려했던 것은 "풍경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그렇기때문에 그의 풍경사진은 단순히 풍경(피사체)을 기록하거나 혹은 아름다움을 전달하고자 하는 여늬 풍경사진과는 맥을 달리한다. 이주형의 풍경이 피사체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피사계"로 느껴지는 까닭 뒤에는 그가 기도하는 풍경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남겨놓은 과정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주형은 그의 사진적 어휘력과 상상력을 실험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할 수 있다.

    풍경(혹은 사물)의 위치를, 혹은 피사계의 존재를 오해없이 전달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두드러진 표정이나 성격의 부여를 피해야 했던 것이기에 그의 풍경은 거의 무기미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만큼 심심한 것이 되고 있다. 서둘러 이야기하자면 바로 그 심심함으로부터 비롯된 자극과 감동의 배제야말로 사물과 풍경을 향한 그의 사진적 태도와 그 실험의 승부처였다는 얘기다. 그것들이 건조하게 느껴지면 질수록, 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게 느껴질수록 오히려 그의 풍경이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들의 상상력을 바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이 분명하게도 우리들 주변을 이루는 풍경, 혹은 피사계로서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을 때 이주형은 그가 설정한 목표치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사진관寫眞觀의 변화가 그 시대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날 풍경을 찍는다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의 풍경을 예고하는 일과 같다. 또 이 시대의 풍경을 통해서 시대의 사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풍경의 기록과 그 새로운 해석에 대한 노력은 중요한 사진적 과제임이 틀림없다. 이주형의 젊은 시각이 그의 시야가 확보했거나 확보해 나갈 이 땅의 풍경사진의 한 성과로 기록되기 위해 그가 내딛는 첫발이 될 것을 기대해 본다.